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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부재(不在)를 직면하는 삶

  • 윤동
  • 2020년 2월 9일
  • 2분 분량

얼마 전 세간에 큰 화제를 모은 다큐멘터리 하나가 방영되었다. 바로 MBC스페셜 특집 VR 휴먼다큐멘터리 <너를 만났다>이다. 4남매를 둔 엄마 장지성씨는 그 중 셋째 나연이를 2016년 혈액암으로 하늘나라로 떠나보냈다. 이 <너를 만났다>라는 휴먼다큐멘터리는 하늘나라로 간 나연이를 첨단 가상현실기술인 VR로 복원하여 엄마와 재회하게 해주는 기획이었다.

현대의 인간들이 받는 이별의 스트레스 순위 중에서 가장 수위를 차지하고 있는 스트레스는 바로 ‘자식의 죽음’이라고 한다. 그건 통계적으로 따져볼 필요도 없을 만큼 직관적으로도 너무나 큰 충격이자,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그야말로 있을 수 없고 있어선 안 될 이별 중 하나이다. 자식의 죽음만 그러할까? 도처에 도사린 죽음이란 그야말로 온통 우리의 삶을 점철하고 있으며, 피할 수도 없고 외면하려고 발버둥을 쳐보아도 거기에 언제나 그대로 있는 그것이 죽음이다.

이 죽음의 문제를 오랫동안 모든 인간들은 고민해왔고, 그 문제를 어떤 방식으로든 풀어내고, 해결하기 위해 종교를, 학문을, 예술을 진보시켜왔다. 우리가 예수를 주로 고백하고 믿는 기독교와 그 신학 또한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참된 것과 선함 및 아름다움 등의 모든 것에 대답하려고 애썼지만, 그 물음들의 핵심에는 바로 2천년전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일어났던 한 사람의 생애와 죽음, 그리고 그가 다시 일어난 사건을 자리시킨 바 있다.

그 중에서도 ‘죽음에의 궁극적인 승리’라는 사건으로 기억되는 예수의 부활은 모든 인간의 고통과 죽음을 기.어.이 이긴 예수의 승리라고 우리는 회자하여, 그리스도인을 포함한 전 세계는 온통 축제를 벌이며 그의 다시 살아난 것을 기념하고 축하한다. 허나, 한편으로는 그런 축하의 뒤안에는 여전히 떨어지고 깔려죽고 부딪혀 ‘생물학적으로’ 죽어버린 이들, 남들의 차별과 배제의 시선으로 사회적 ‘공간’이 없어 살아도 죽은 것처럼 존재하는 이들이 있다. 우리가 예수의 부활을 늘 축하한다 해도 우리는 늘 허전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번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를 통해 더욱 절감했듯 눈에는 잘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지만, 죽음과 부재(不在)가 내 피부 곁에 시시각각으로 나를 덮치고 있기 때문이다.

나연이와 그 엄마의 이야기에서도 엄마는 나연이의 부재 속에서 허우적댄다.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본다. 보내고 싶지 않은데, 보내야만 하는 딸의 죽음 앞에서 울어봐도 소용없지만 계속 눈물이 흐른다. 아팠던 나연이의 사진을 불로 태워도 보고, 쉬를 늦게까지 못 가린 나연이의 침대를 버리지 않고 가지고 있어도 본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엄마 장지성씨는 VR기술로 재현된 ― 아니, 살아서 앞에 있는 ― 나연이 앞에서 자식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엄마, 이제 안 울고, 너 그리워하지 않고, 너 많이 사랑할게.”

2020년 올해는 2월 26일, ‘재의 수요일’을 시작으로, 그리스도인은 어김없이 예수의 이야기를 통한 인간 보편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의 계절을 지난다. 예수의 시체가 없는 것을 직면하고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도 저미어진 가슴으로 ‘그가 살아나셨다’ 증언하던 여인들처럼 우리 또한 반복적인 의례와 허튼 축하의 팡파르를 거두고 내 주변의 죽음을 직면하고 부재(不在)와 공존하는 아름다운 계절이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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