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주일에 부쳐
- 송기
- 2018년 5월 19일
- 3분 분량
중학교 교실에서 물리적 폭력을 여러 번 경험했었다. 한번은 점심을 먹으러 가는 아수라장 속에 내가 강00의 어깨를 흔들고 간 모양이었다. 그게 기분이 나빴는지 식사 후에 자기 좀 보자며 똘마니를 시켜 나를 불러냈다. 호랑이 앞의 생쥐마냥 잔뜩 쫄아있던 모습을 보여서 였을까 다행히도 주먹으로 얼굴 한 대 배 한 대를 치고 사건은 종료되었다. 그 옆에 있던 양아치 쪼무래기들이 그 다음 쉬는 시간에 나를 놀리던 것은 보너스였다. 얼굴에 든 작은 멍을 이틀정도 집 안에서 숨겨야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나는 너무..무서웠다. 꼭 폭력이 아니었더라도 폭력을 피하기 위해 (누군가에겐 장난 또는 짓궂음 으로 여겨질!) 긴장했던 시간들, 숨어서 먹던 도시락, 슬리퍼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매 쉬는시간 발꼬락에 힘 주던 것들을 다 포함한다면 일상의 폭력이 주는 공포는 나에겐 실로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랜덤으로 내가 언제 피해자가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맞서 싸우는 놈들은 안건드렸지만 그렇지 못했던 나의 중학시절은 그렇게 찌그러져야만 했다. 학교폭력의 해결을 위해 한번은 용기를 내어, 선생님께 이른다고 말했던 적이 있다. “너 그렇게 말했다가 박00이가 어떻게 되었는지 아냐!”며 협박하던 한00가 생각이 난다. 정--말 무서웠다. 동시에 아무리 우리 반이
정의감 가득한 체육 선생님이 담임이셨지만, 이 문제는 아무도 도와줄 수 없구나 하는 공포가 나를 지배했다. 이건 학교나 법 제도가 해결해 줄 수 없구나..같은 깊은 종류의 좌절 같은 것은 지금도 내 안에 가시처럼 자리잡고 있다. 교회에서 목사라는 사람이 예수 믿는 청년들 잘 되었으면 좋겠다며, 심지어 예수 믿는 사람이 일진을 하는 것은 어떠냐고 서슴없이 제안하기도 했다. 소수의 청년들이 그 의견(영향력있는 기독교인 + 그것들을 위한 잘못된 예시)에 반박하고, 나도 학교폭력 당해본 입장에서 적절하지 않다고 말을 거드니 토론의 열세에 밀린 그는 나(파트전도사)에게 “그러면 한번 학교폭력 당해본 분의 입장에서 이야기 들어보겠습니다” 라고 자신의 열세를 나에게 돌리던 그 목사가 생각이 났다. 이야기를 조금 더 하자면 요새(아니 거의 전 역사를 통틀어) 여성이 당하고 겪는 일상의 폭력과 공포가 얼마나 심각한지 조금 알려지고 있다. 하지만 어째 그러면 그럴수록 늘어나는 것은 미친 남자들의 댓글 뿐이라... 과연 몇 명의 남성이 늦은 밤 귀가 길을 무서워 해봤으며, 화장실 몰카에 두려워 해봤을까? 노상방뇨만 잘하고 남녀공용 화장실에서 음흉한 생각하기도 바쁜데 말이다. 나야 고작 3년여의 중학시절에 겪은 고통을 가지고도 이렇게 성인이 되어서 까지 조금씩 영향을 받고 있는데, 거의 평생을 그러한 랜덤의 폭력-성폭력을 당하며 살아야 하는 여성의 입장이라면 그 속에 쌓인 깊은 좌절과 공포는 얼마나 클까? 나는 짐작할 수 없다. 하지만 남성들은 그 목사같이 뻔뻔히 되묻는다. 그럼 어디 피해자의 증언을 들어볼까요? 저는 떳떳합니다. 평생 여성에게 손찌검 한번 안해봤습니다. 조금 겸손하게 말해주실래요? 남자도 상처받는답니다. 한국 남자 충분히 잘하고 있습니다.

“한국 남자 충분히 잘하고 있는가?” 이 어처구니 없는 게임 광고를 보며, 많은 생각이 들었다. 더군다나 한남충 이라는 단어에 대한 반응을 아주 대단한 삼행시로 맞받아치고 있으니 말이다. 왜 저런 멍청한 광고가 내 타임라인에 뜨는지 더더욱 모르겠지만, 한국 남자들이 가지는 폭력위계의 우위가 명확함을 깨닫는 사람은 가해자 남성이 아님은 확실하다. 우리는 경험하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영역에 너무나 쉽게 결론을 내리려 한다. 마음 속에 견고히 내려진 작은 결론은 자신이 불리해 지는 환경, 자신이 고발되는 환경 속에서 강력한 무기로 작용한다. 깊은 사고의 과정이나 이해하려는 몇초도 안되는 시간을 가지지 않고 그대로 자신의 결론으로 다른 사람들을 결론짓는다. 내가 느작없이 왜 이렇게 글을 쓰는가, 괴로워 하면서도 굳이 정리까지 해가며 이런 수고를 하는가 생각해본다. 내 나름대로 내 일상에 찾아온 폭력과 괴로움에 대한 저항이라 생각한다. 미처 어린 시절에 끝내지 못한 싸움을 이제야 싸우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래도 한다는 마음의 힘을 내어 본다. 성령강림주일이 시작되었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성령이 기도해주신다는 말 속에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일상속에 깊이 새겨진 공포에 관한 위로도 담겨있다고 생각한다. 자기는 보수적이라며 젠더이슈에 대해 공부 안한다고 말하던 친구의 말을 생각하며, 폭력의 굴레에 갇혀 나보다 더 약한 친구 이00, 정00에게 폭력을 행사했던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누구나 폭력하며 폭력을 받을 수 있음을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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