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그린 기린그림
- 송기
- 2018년 3월 18일
- 3분 분량
평소 예술과 아름다움 진실-선함-아름다움 등등의 화려한 미사여구를 내뱉으며 여럿 감성파친구들의 공감을 수시로 자아내던 한 사람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 자신에 대해 다수에게 한꺼번에 말하지 않았다. 다수에게 말하게 될 때는 몸을 배배꼬며, 평소에 갖추고 있던 설득력도 버리는 듯 했다. 다수에게 자신을 드러내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다수로 부터 예술적인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으니 그 얼마나 만족스러운 일인가 스스로 내심 기뻐하고 있던 터였다.
그는 아마 오래도록 그가 예술적인 사람이라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에게 예술은 손가락을 한번 튕기면 저절로 생겨나는 마법의 부산물 같았고, 자기 스스로를 예술가라 증명하지 않으면 무어라 말하겠는가 생각하며 살았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의 객적은 몇마디를 듣고 좋아하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다.인간관계는 멀어져 갔고, 그의 활동범위 역시 축소되어가고 있었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지 그를 다시 알려야만 했다. 그가 예술가로 불렸던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러기에 그는 그의 존재를 증명해 보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예술가가 되어야 했다.
그렇게 그는 몇년전 선물받은(아마 선물해준 사람은 그가 얼마나 입으로 예술예술 하면서 실제로 1도 예술적이지 않은 사람이란것을 알았던 모양이다) 자그마한 캔버스를 움켜쥐었다. 속으로 “나는 아직 살아있어! 나는 아직 살아있다고!" 외치고 있었다.
하지만 한참이고 연필을 들고 고민했지만, 예술은 커녕 1획도 그을 수 없었다. 두려웠던 것이다. 자기 안에 아무것도 없었으니. 순백의 캔버스(그가 그토록 말하던 진리에 가까운 것 같다)앞에서 그간 자신이 살아온 세월이 아무것도 아니었음이 폭로되었으니 말이다.
따라그릴 사진을 찾아보기도 하고, 명화를 보기도 하였다. 그리고 가장 가증스럽게도 꽃, 꽃 사진을 오래도록 보았다. 그러면 뭐라도 나올 줄 알았던 모양이다. 꽃은 선하다하고 생각했던 그 무언가 마저 의미없게 되었다. 그렇게 그는 작은 캔버스 앞에서 좌절을 겪어야만 했다.
얼마간 시간이 지났을까? 그는 동그라미하나를 무심결에 그려보았다. 시작을 해서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는 원은 그로 하여금 헛된 것을 찾아 보려던 그의 행동이 얼마나 보잘 것 없었는지, 결국 허영심과 거짓의 터널을 지나 다시 그의 본 모습으로 돌아올 수 밖에 없음을 보여주었다.
원이 그의 마음의 허구를 밝혀냈지만, 무슨 이유에서 였을까 그의 마음에는 작은 안도감이 찾아들었다. "시작했으니 괜찮다. 알면 됐다." 라는 내면의 소리가 그를 용서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조심스럼게 몇 개의 원을 더 그려넣었다. 그 원들을 그려넣고 나니 나 자신에서 벗어나 다른 인간들의 삶이 들여다 보이기 시작했다.
각자의 아집 속에 파묻혀 살아야만 했던 사람들, 그럼에도 끊임없이 용서받기 위해, 혹은 용서하기 위해 삶의 쳇바퀴를 돌리는 사람들의 인생이 뒤섞여 퍼져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모습, 인간의 궁상을 그는 그대로 옴겨 그렸다.
그 스케치가 바로 이 그림이다.

스케치를 하고나니 색칠이 문제가 되었다. 다양한 예술을 좋아한다는 그의 까다로운 취향과는 다르게 그는 언제나 단색의 옷만을 입을 정도로 남에게 색으로 드러나는 것을 극도로 꺼렸기 에 색을 입힌다는 것은 그 자신의 속내를 온전히 드러내야만 하는 작업이었다.
그에게 무색의 캔버스라니, 그리고 색을 입힐것인지 말것인지 묻는 태연함 앞에서 그는 또 한참을 머물러야 했다.
결국 예술적이라는 그가 선택한 첫 번째 색은 노란색이었다.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을 동경하기에 노란색을 선택했는지, 적록색약인 그의 눈에 제일 잘 띄어서 선택했는지는 그 스스로도 알 수 없었지만, 고결한 예술적 취향을 가졌다는 그로서 선택하기에는 다소 부끄러운 색이었을 것이다. 그는 색이라는 세계 앞에서 그가 그토록 동경하고 자신과 일치시키려던 다채롭고 다양하고 독특한 무언가!를 표현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붓과 물감의 질감을 미처 파악하지 못했기에 원하는 만큼의 색이 캔버스에 먹지 않고, 스케치 해놓은 연필의 선이 비춰지기 시작했다. 그림이 망쳐지기 시작했다. 색의 세계가 폭로하는 진실을 덮기 위해서 그는 다른 색깔들을 써야만 했다.
그는 어쩔수 없이 조금씩 색을 칠해가며, 붓과 물감이 가르치는 가르침에 따를 수 밖에 없었다. 색의 세계 앞에서 그림을 그린다고 으스대며 시작하던 그의 첫 모습은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매우 단조롭고 초보적인 수준에 머물러 버렸다.
첫 채색은 다음과 같았다.

노란 색을 색칠한 뒤에도 찬란한 색의 세계를 담아 낼 수 없었다. 단조로움을 피해보려 선택한 짙은 녹색은 누군가에게 치명적으로 입힌 상처처럼남아 지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진실의 캔버스는 그에게 질문하기 시작했다.
"이대로 멈출 것인가?"
그는 무한한 색의 세계 앞에 멈춰섰다. 예술가라고 자부하던 그의 내면이 이정도 밖에 되지 않는 다는 것을 또 고백해야만 했었다. 고해성사를 하듯 캔버스 앞에서 한참을 고민하던 그는 결국 스스로에게 검은색(죽음)을 꺼내들 수 밖에 없었다. 결과는 보다시피 죽음 그 자체였다.

그의 예술, 아니 예술은 곧 그 였던 자신이 완전히 부숴졌다. 이것은 실패다라고 선언해도 충분할 만큼 그가 추구하던 모습과 정 반대의 그림이 나와버렸으니 말이다.
그 앞에서 그는 멈출 수 밖에 없었다. 그는 더 이상 어떤 의미나 자기 자신을 추구하려 하지 않았다.
또 한 소리가 들려왔다.
"이렇게 끝낼 것인가?"
그는 다시 붓을 들었다. 남은 부분들을 검은색으로 마저 채우고, 부분부분 마무리를 지었다. 특별히 짙은 녹색으로 뒤덮여 버린 큰 부분을 흰색으로 덧칠하였다. 억지를 부리는 것 일수도, 혹은 선생님에게 혼나기 싫어 억지로 사과를 해야하는 어린이처럼 그렇게 덧칠을 하였다.
빛의 삼원색은 겹칠수록 투명해 지지만, 색의 삼원색은 겹칠수록 어두워 진다. 그는 그의 미숙함 탓에 색들을 겹치며 어둡고 짙은 그림을 그려버렸지만, 그의 마음 속에서 겹쳐있던 아집들은 하나 둘씩 거두어져 갔다.

그의 첫 번째 그림은 여기서 멈추었다.
하지만 그의 그림은 또 다른 그가 되어 여전히 그에게 말해주고 있었다.
더 그릴 것이냐 말 것이냐를 물으며.